[스토리클럽 2기]새문 안팎의 붉은 벽돌집: 서울의 집 100년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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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 안팎의 붉은 벽돌집: 서울의 집 100년

 


신림동 안씨


네가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엔 비둘기가 앉아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봤어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들은 이 집을 머릿속에 그려내지 못할 거야.

넌 이렇게 말해야겠지. "10만 프랑짜리 집을 봤어요."

그러면 어른들은 감탄할 거야. "정말 예쁘겠네!“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26살의 여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에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다. 어릴 적 읽었을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문장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문장들이 희미해지고 오로지 이 문장만 기억에 남아버렸다. 그때 연애편지 한 통에 이 문단을 옮겨적으며, 감수성을 잃지 않는 어른으로 살고 싶다는 ‘뻐꾸기’를 날렸더랬다. 스무 해가 지난 뒤, 다행히도 나는 ‘촉촉한’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그저 그런 집이 ‘10만 프랑’쯤 하겠다는 견적도 낼 수 있는 어른이 됐을 뿐이다. 여전히 붉은 벽돌집을 사랑한다.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하게 되는 벽돌집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이든, 1960년대에 지어진 것이든, 1980년대에 지어진 것이든, 21세기에 지어진 것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사진1> 국가등록문화재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파사드로 드러나는 박공면과 나무틀 창문, 현관 포치와 계단 그리고 적벽돌 마감은 전형적인 ‘붉은 벽돌집’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으로 ‘붉은 벽돌집’을 만나게 된 것은 1987년의 일이었다. 동네에서 저지레를 치고 다니던 악동들에게 자전거란 이동수단이 생겼고, 그리하여 원주 시내 곳곳을 쏘다니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내를 쏘다니다 보니, 순수하지 못했던 어린이들은 수상한 시국의 불온함은 눈치챌 수 있었다. 원주기독병원 정문과 A도로(원주 구도심의 가장 번잡한 도로) 사이에서 방석복 차림으로 방석펜스를 준비중이던 기동대 의경들을 발견했다. 데모 구경이나 하자며 신이 났던 철없는 악동들은 의과대학 뒤편으로 화염병을 옮기는 학생들을 뒤쫓았다. 그때 처음 발견한 것이 <국가등록문화재 원주 기독교 의료 선교 사택>이었다. 1918년에 지어진 지하1층, 지상 2층의 붉은 벽돌집은 하얀 색 페인트 칠이 된 나무 창문이 나 있었고, 의과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중이었다. 처음 보는 이국적인 풍경에 사악한 꼬마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다만 그 평온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학내 진입을 시도한 의경들은 최루탄을 쏘아댔고, 생전 처음으로 경험한 그 매서움은 눈물과 콧물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1996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상경했다. 서울살이를 시작한 뒤로 정말 다양한 붉은 벽돌집들을 보았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데이트 중에 만난 정동의 숱한 근대건축물은 말할 것도 없이, 종로와 을지로 곳곳에서 교회, 은행, 학교,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집을 만날 수 있었다. 게다가 ‘박정희의 정도전’이란 별명까지 생긴 건축가 김수근과 그의 건축사무소 공간에서 설계한 건축물들이 붉은 벽돌을 시그니처처럼 사용해 서울 시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진2> 오른쪽 멀리 보이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은 김수근이 안기부 정동분소로 건축한 건물이며, 가운데는 그의 제자 윤승중이 설계한 조선일보 미술관,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 역시 김수근의 제자 김원이 설계한 대한성공회 성가수녀원이다. 외장을 적벽돌로 마감했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특히나 새문 안팎은 각별하다. 19세기 말, 정동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외국인들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 북쪽 동네는 일본 공사관의 영향으로 일본인들의 거리가 만들어졌다. 그렇다 보니 새문 안팎은 어느새 ‘조선 속의 조선 아닌 동네’가 됐다. 행촌동의 딜쿠샤, 홍파동의 홍난파 가옥, 신문로2가의 캠벨 선교사 주택, 돈의문박물관마을 안의 플레장, 테일러의 집터 등으로 쉽게 드러난다.

 

 새문 안 동네라면, 우선 정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근대 역사가 그대로 숨쉬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거니와 붉은 벽돌집이 너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사적 덕수궁 안에만 해도 1899년에 지어진 2층집 중명전이 있고, 그 무렵에 지어졌으리라 생각하는 정관헌도 있다. 지금은 돈덕전도 복원 중이다. 어쭙잖게 제국을 자칭하면서 하나 둘씩 지은 서양식 집들은 바라보고 있자면 처연해지긴 한다. 특히나 을사늑약의 장소인 중명전에서 매국노들의 밀랍 인형을 바라보고 있자면 착잡함은 더욱 심해진다.


 정동에는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 프랑스공사관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렇게 서양의 공관들이 자리를 잡고 나니, 개신교의 교회와 그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학교들도 이곳 정동에 자리를 잡았다. 1898년에 지어진 정동교회는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연가>에서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으로 그려지고 있다. 막상 그 눈덮힌 풍경을 눈으로 직업 확인하게 된 건 이태가 되지 않은 듯하다. 교회 바로 근처에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었다. 국가등록문화재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배재학당 동관은 1916년에 자리를 틀었다. 학교 부지를 팔고 이사를 간 배재고등학교와는 달리, 여전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화여고는 정동길에 맞닿은 돌담을 쌓아 이곳의 정취를 더하고 있다. 이화학원에서 갈라져나온 예원학교도 그 맞은 편에서 오래된 담장에 장미를 드리우며 터주의 한 자리를 노리고 있다.


<사진3> 사적 서울 정동교회. 누군가 “정동에서 본 붉은 벽돌집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곳을 꼽았다. 지금은 벧엘예배당이란 별칭이 붙어 있다.

 

 새문 안 북쪽으로는 신문로2가와 사직동이 있다. 정동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신문로2가와 사직동은 좀 다를 테다. 경희궁터를 감싸 안은 모양의 신문로2가와 사직터널로 인해 반으로 쪼개져 경희궁터 북쪽의 골짜기에 걸터 앉아 있는 사직동은 인왕산 동사면에 마치 한 동네처럼 웅그리고 있다.


<사진4> 경희궁터 북쪽에서 바라 본 사직동과 신문로2가. 등성이 일부가 신문로2가에 속하며 사면을 타고 내려오는 동네가 사직동이 된다.

 

 이 오래된 동네에는 1930년대 도시한옥을 시작으로, 1940년대의 문화주택, 1960년대의 붉은 벽돌집이 자본의 완력에 웅숭그리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지어진 멋진 단독주택이 리노베이션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고, 넓은 필지에 놓여 있던 대저택들은 21세기의 저택으로 환골탈태하고 있다. 어찌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동네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꽤나 약삭빠르게 세월을 따라잡고 있다. 묘한 동네다.

 인왕산 산등성이를 따라 신문로2가에 속하는 골목에는 꽤 큰 저택이 서 있다. 과거 유명 주류회사 회장님의 저택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증축을 할 수가 없어서 방치됐다고 전해진다. 바로 그 옆에는 해병대 장군님이 60년대 말에 지었다는 이층집이 놓여 있다. 최근에 리모델링을 통해 외벽이 ‘붉은 벽돌’로 바뀌었지만, 4년 전까지만 해도 1960년대 말에 사직동이나 효자동 일대에 지어진 저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었다.

 장군님댁 앞은 조망이 꽤나 좋은 편이다. 그 집의 내력을 들려주셨던 동네 어르신들은 북악산과 북한산이 보이면서도, 여름에도 들이치는 시원한 바람이 좋은 곳이라 말씀하셨다. 늦여름의 늦은 오후에 나른함을 깨우는 외부인의 질문에 꽤나 많은 말씀을 나눠주었으나, 여전히 ”그런데 그건 왜?“라는 경계심까진 버리지 않았다. 10년을 넘게 끌어온 이곳의 재개발 문제 때문에 원주민들간에도 세입자와 지주 간에도 꽤나 반목의 골이 깊어진 모양이었다. 산등성이를 넘어 아파트촌으로 변한 교남동, 송월동, 홍파동, 평동을 보자면 심란해질 만도 하다 싶다.


<사진5> 경희궁터 북쪽 인왕산 자락 등성이에 1960년대 말에 지어진 해병대 장군님댁. 유구 발굴과 재개발 등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신축을 추진하지 못하고 리노베이션했다. 그 과정에서 적벽돌을 외장재로 사용했다.


 신문로2가의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행촌동과 홍파동이 나온다. 행촌동에 처음 발길을 들이밀었던 건 10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다 쓰러질 듯한 모습의 딜쿠샤에는 무단점거한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이야 딜쿠샤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쌓게 됐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름과 건축 연도 정도만 알 뿐이었다. 사유재산에 멋대로 침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주민의 초상권을 해치면서까지 ‘빈곤의 포르노’를 찍어올 사명감 같은 것도 없었기에, 열려 있는 현관 앞에서 맥없이 서 있다 돌아왔었다. 이미 해는 졌고, 저녁의 여명 속에서 마침 다가오는 마을버스에 올라탔더니 스위스대사관 앞을 지나 서대문역에 도착했다. 서대문역에 도착했을 때엔 토끼굴을 빠져나온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돈의문뉴타운 사업이 개시된 이후였다. 2014년 2월의 송월동 풍경은 그냥 폐허였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덜컥 떨어지고 말았다.


<사진6> 2021년 서울역사박물관 산하로 개장한 딜쿠샤.

 

 돈의문뉴타운 밖인 행촌동, 홍파동에는 80년대 연립주택과 90년대 다세대 주택이 붉은 벽돌을 휘감고 앉아 있다. 80년대 초반에 지어진 연립주택은 쓸데없는 지하공간과 2층의 층고 제한에 묶여 있었다.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대중화된 이후라서 기초적인 내력구조에는 조적조 공법이 사용되지 않게 됐지만, 칸막이 미장에는 여전히 벽돌을 쌓았다. 미장에서도 붉은 벽돌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잦았다. 행촌동 1번지의 연립주택을 보는 순간, 1980년대 초반 홍천 읍내와 원주 시내에서 종종 보았던 연립주택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사진7> 행촌동 1번지에 위치한 연립주택. 1980년대 연립주택은 2층으로 층고가 제한되었고, 반드시 지하실을 갖추어야 했다. 연립주택들의 외장재는 여지없이 적벽돌이 사용됐다는 것도 특징이다.


 행촌동에서 홍파동쪽으로 발길을 돌리다 보면, 붉은벽돌로 미장을 한 3층과 4층짜리 다세대 주택을 볼 수 있다. 이 몰개성적인 주택들이 서울 땅을 점령하게 된 건 1990년의 일이라고 한다. 용적률을 300%와 400%로 완화한 것이 그때인데, 노태우정부의 ‘주택 100만호 건설’ 정책과 맞물렸던 것이다. 사대문 안은 물론이고 성저십리의 주택들이 죄다 이 테라코타 적벽돌의 몰개성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던 것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란 어느 아파트 광고의 카피가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집은 사는(buying) 것이 아니라 사는(living) 것’이란 말에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자가를 소유하기 위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학력과 직업과 부모자산 증여 여부에 따라 스테레오타입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밴드왜건에 몸을 실은 소시민들은 쉽사리 뛰어내릴 수 없게 된다. 참 슬픈 이야기다.


<사진8> 홍파동에 위치한 다세대 주택. 1990년대 초반 서울시의 용적률 상향으로 엄청나게 많은 다세대주택들이 지어졌다. 이 때에도 외장재는 다양한 형태의 적벽돌이 사용됐다.

 

 1세기의 시간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 서울만한 곳이 흔치 않다. 전쟁의 피해가 그나마 적은 편이었던 몇몇 항구 도시를 제외한다면, 전쟁통에 쑥대밭이 되어서 반동강이 났거나, 전쟁 이후에나 동네가 근대화되면서 아예 그 앞 반동강이 없거나라서 그렇다. 시간을 가장 잘 간직하는 지층으로 ‘집’만한 것도 없다. 세대를 거치면서도 조금씩 고쳐 가며 계속 생활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지어진 도시한옥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만으로 설명이 충분해진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집’이 갖는 의미는 서구사회와 제법 결을 달리하다 보니 꽤나 자주 모습을 바꾸곤 한다. 돌아보며 발밑을 단단히 딛는 것보다, 숨차더라도 앞을 보고 무조건 달려야 하는 우리네 모습을 집마저도 닮아가는 듯해 속이 편친 않다.

 그저 이렇게 오래된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추억 한 웅큼과 감성 한 모금을 진통제처럼 삼킬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년시절 원주 시내 곳곳을 설쳐대던 때에 보았던 60년대~80년대 주택과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풍경에서 깊은 향수와 안도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저런 붉은 벽돌집과 함께 했던 지나간 벨 에포크를 추억하고, 이런 붉은 벽돌집에서 기어코 살 것이란 꿈을 품으며, 또 그렇게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는 게 아닐까 싶다.

 

<사진9> 2017넌 신문로2가에 신축된 저택. 고령토를 구워서 빚는 회벽돌과 철분이 많은 점토로 굽는 적벽돌을 외장재로 사용했다. 땅값만도 공시가격으로 70억이다. 더 한갓진 곳에 지어진 오래된 한덕수 총리의 집이 100억 정도 하는 것을 보면, 이 집은 그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그저 ‘예쁜 집’에 대한 욕망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집이다.


필자소개 : 스토리클럽 2기 안철

서울이란 도시를 사랑하는, 그리하여 서울 곳곳을 놀러다니는, B급 감수성을 지닌 자유로운 영혼의 보헤미안이라 15년째 우기는 중.

실거주기간은 서울에서 25년이 가장 길며, 신림동에서만 18년째 서식중.

출생신고는 강원도 홍천, 주민등록상 가장 오래 거주한 곳은 강원도 원주, 고등학교 생활은 강원도 춘천.

그리하여 여전히 '강원도 산골중년’과 '서울 아재' 사이에서 자칭을 고민중.

출생지는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들어서면서 없어졌고, 유년시절을 보낸 동네는 시청이 들어서면서 없어졌고,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동네는 택지개발로 없어져버린 21세기형 실향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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