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클럽 2기]서울의 '맛'에 담긴 시간 - #01 냉면삼대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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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맛'에 담긴 시간 - #01 냉면삼대

 

 김진일


#01 ‘인스타 감성’이 아닌, ‘추억’을 부르는 맛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이 잡혔다.

예전 같으면 블로그나 인스타에서 요즘 가장 핫하고 힙한 레스토랑을 찾아서 장소를 잡았겠지만,언젠가부터 식당을 찾을 때의 검색어로 ‘노포’를 넣게 되었고, 요즘은 그마저도 거르며 예전에 갔던 곳들 중에서 장소를 정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오장동흥남집’은 ‘함냉파’인 내가 가장 먼저 꼽고, 가장 자주 찾은 냉면집 중 한 곳이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고, 작년에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이 곳의 냉면을 만나지 못하고 보낸 여름이 벌써 서너 해가 흘렀다.

 

말복이 지나고 처서에 접어들고 있던 8월의 어느 날, 2022년의 여름을 완전히 보내기 전에 밀린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이 곳을 제안했고, 다행히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는지, 우리의 약속 장소는 이 곳으로 정해졌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곳에 얽힌 각자의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군 전역 후 부모님과 서울 시내에 볼 일이 있어 왔을 때 함께 방문했던 것이 내 기억 속 첫 방문이니, 나름 20년 가까운 방문 이력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는데, 이는 놀랍게도 가장 짧은 축에 속했던 것이다. 

학창 시절 매년 여름이면 이 곳의 냉면으로 여름을 시작했다는 친구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이 곳에 왔었다는 친구까지. 이 날 모인 네 명의 단골(?)기간을 합치니 백 년이 쉽게 넘어갔다.

 

사실 빨간 양념의 함흥냉면은 어린 아이들이나 학생들에게는 썩 익숙한 메뉴는 아니다. 하지만 매운 냉면 한 젓가락에 따끈한 육수 한 모금으로 입 안의 매움을 가시던 아이들이 자라 이렇게 지금까지 이 곳을 잊지 않고 찾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이 냉면 한 그릇으로 인해 옛 이야기들이 술술 나올 수 있는 원동력은 어떤 것일까?

문득 내가 미처 기억하고 있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이 곳에 얽힌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물음표를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02 한 그릇의 냉면으로 오늘의 나를 위로하고, 내일의 나를 응원하다

 

마침 오장동흥남집에서의 만남이 있었던 며칠 뒤, 아내와 아들과 함께 본가를 찾았다. 다같이 밥을 먹고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오장동흥남집에 얽힌 아버지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지방에서 올라와 어렵사리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시골 청년에게 냉면 한 그릇은 월급날에만 즐길 수 있는 작은 호사였다. 첫 번째 젓가락에 지난 한 달 동안의 고단함을 날리고, 두 번째 젓가락에 조금 더 나아질 내일을 꿈꾸었다. 

옆 테이블에서 시킨 수육에서 풍기는 구수한 고기 냄새는, 다가올 한 주일의 용돈을 조금 아껴서 시킨 추가 사리로 간신히 잠재웠다고 한다.

너무 어려서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이 곳의 첫 번째 방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이 태어난 후, 아버지는 어머니의 육아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네 살 배기 아들의 손을 붙잡고 매주 일요일 아침 집을 나섰다고 한다. 토요일 저녁 늦게까지 일하느라 이불 속 따스함이 너무나 간절했지만, 아버지는 어린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남산 등을 다니며 아들과의 추억을 쌓는 데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그 당시 시내에서 송파구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는 동대문을 지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네 살배기 아들과 함께 아버지가 자주 찾은 곳은 바로 오장동흥남집이었다. 

처음 그 곳에 오셨을 때처럼 냉면 한 그릇에 추가 사리를 주문하지만, 이제는 제법 큰 아들을 위해 꽤 여러 젓가락을 아들 몫으로 덜어야 한다. 아직은 매운 것을 먹기 힘든 나를 위해 잘 비빈 냉면을 육수컵에 헹궈서 숟가락에 돌돌 말아 입에 넣어 주어야 한다.

 

부드러운 수육은 아이도 잘 먹을 것 같지만, 아버지 한 명의 월급으로 두 아이와 아내, 어머니까지 다섯 명이 생활해야 하던 터라, 선뜻 지갑이 열리지 않는다.

나와 여동생이 성인이 되었을 때, 네 가족이 오랜만에 이 곳을 찾았다. 그 때까지 평소 외식을 잘 하지 않았던 우리 집인데, 이 날은 오롯이 이 곳의 냉면을 먹기 위해 이 곳을 찾았다. 

어쩌다 집 밖에서 냉면을 먹더라도 다른 메뉴를 거의 시킨 적이 없던 아버지께서 이 날은 수육을 시키셨다. 그 때는 무슨 일인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의 수육은 아버지의 오랜 숙제와 같은 한 접시였던 것 같다. 

그 뒤로 이 곳을 찾을 때마다 수육은 무조건 시키는 메뉴가 되었다.


 


#03 알려 주고픈 한 젓가락, 함께 하고픈 한 그릇

 

친구들과 오랜만에 오장동흥남집을 찾았던 그 날, 친구 하나가 추가 사리 그릇을 나에게 내밀며 냉면 그릇에 옮기지 말고 사리만 한 번 먹어보라고 알려준다. 자기가 이 곳에서 처음으로 배운 맛이라고 한다. 

한 젓가락 조금 덜어서 먹어보니, 구수한 면에 간장과 참기름으로 살짝 간이 되어 면만 따로 먹어도 생각보다 맛이 괜찮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에게 먹이기엔 이게 더 나을 듯 하다.

이 곳은 아이가 조금 더 크고 매운 걸 조금 먹을 줄 알게 된 이후에 데리고 와야겠다는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삶은 면과 소고기는 지금도 두 살 배기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이다. 이 곳에 삼대가 함께 올 수 있는 날을 제법 많이 앞당길 수 있을 것 같다.



2022년의 여름은 이제 끝났지만, 냉면은 원래 추운 겨울에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 조만간 부모님을 모시고 이 곳에 다시 한 번 와야겠다. 동네 프랜차이즈 식당처럼 아기 의자나 전용 식기는 없지만, 수십 년 전 아버지도 그런 것의 도움을 받으시지는 않았을 테니.

아버지보다도 2년 빠른 1953년생인 이 가게가 지금까지 살아남고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며느리도 모를 것 같은 이 집만의 비법 양념 덕분 만은 아닐 것이다. 

한 그릇의 냉면에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듬뿍 담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오롯이 전해진 덕분이 아닐까? 그 따뜻함이 오래오래 이어지고 퍼져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오랜만에 맛 본 냉면 한 그릇과 수육 한 접시 덕분에 어제를 추억할 수 있었고, 오늘에 조금 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새로운 가족과 함께 다시 방문할 내일을 기약할 수 있었다. 

추가 사리에 수육으로 시작할 냉면삼대의 첫 방문 일정과, 오리지널 회비빔냉면이 더해질 두 번째 방문 일정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필자소개 : 스토리클럽 2기 김진일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이후 사는 곳은 거의 경기도. 서울에서 공부했지만, 취업 해서 작년까지 경기도 근무. '나들이'와 '여행'의 공간이었던 서울로 출퇴근 한 지 1년 4개월째.

'놀이'의 공간에 '일'이 더해져서 싫어질 줄 알았는데,아직까지 사무실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숭례문이 반갑게 보이는 경기도 촌놈. 

이번 주말엔 유모차 끌고 어디를 놀러가야 하나 고민하는 19개월 남자 아이의 아빠. 숭례문을 향한 반가움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주말 나들이 고민에 대한 답을 가능한 많이 찾아서 열심히, 꾸준히 기록하고 실천하고픈 성실하고 욕심 많은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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