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클럽 3기]계절이 그린 서울, 서울이 그린 계절

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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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그린 서울, 서울이 그린 계절


김진규



○ 들어가며

가을이 끝났다. 올가을은 예년보다 길고 따뜻했다. 그 친절한 온기 덕분에 매년 스치기만 하던 가을의 품에 풍덩 빠질 수 있었다. 달력을 한 장 넘기자 한파가 몰아친다. 그래,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지. 혼잣말을 되뇌며 자연스레 지난 계절들을 떠올린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것은 각 계절이 한시성(限時性) 지닌다는 말이다. 역설적으로 그 덕에 모든 계절에 애틋함을 느끼고 지나간 풍경을 또렷이 기억하게 된다. 계절이 꼭 맞는 공간 위에 내려앉을 때 더욱 그렇다. 계절이 서울 위에 그린 그림들,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들을 만끽하기 위해 나는 매년 발로 지도를 그렸다. 올해도 그 지도를 따라 걸었고, 내년에도 그 지도를 따라 걸을 것이다.



1. 나의 봄이 시작되는 곳, 경의선 숲길


봄은 아기다. 모두가 봄을 좋아하고, 봄을 기다린다. 봄의 소식이 들리면 누구나 반가운 마음으로 마중을 나간다. 특히 남쪽이 고향인 나에게 서울의 추위는 혹독한 것이었기에, 매년 꽃이 피기도 전에 미리 봄을 만날 준비를 하곤 했다. 눈이 녹기 시작할 무렵이면 봄을 향해 걷는다. 목적지는 서울에서 봄을 만나기 가장 좋은 곳, 꽃보다 설렘이 먼저 피어나는 경의선 숲길이다.


 
경의선 숲길의 봄



- 버려진 철길에도 꽃이 피었다. 

경의선 숲길은 과거 경의선 철도가 지나던 길을 선형의 공원으로 재구성한 곳이다. 2012년 대흥동 일대를 시작으로 2016년 마침내 연남교사거리부터 효창공원역 일대까지 6.3km의 전 구간이 개방되었다. 공원이 생기기 전까지는 경의선 '철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도심 속의 버려진 공간이었으나, 불과 몇 년 만에 단절된 동네들을 이어주는 선형(線形)의 '숲길'로 다시 태어났다.


경의선 숲길은 지역에 따라 여러 구간으로 나뉜다. 흔히들 '연트럴 파크'라고 부르는 연남동 구간(연남교 - 홍대입구역), 와우교 구간(홍대입구역 - 서강대역), 신수·대흥·염리동 구간(서강대역 - 공덕역), 새창고개-원효로 구간(공덕역 - 효창공원역) 등 총 4개의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봄을 만끽하기 가장 좋은 이른바 '상춘로(賞春路)’는 바로 신수동부터 염리동까지의 마포 구간이다.


봄과 마포 구간이 잘 어울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여유롭다. 연남 구간이나 홍대 구간의 경우 그 자체로 약속 장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주말엔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기 마련이다. 각종 공연과 행사,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로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새로 온 계절이 스며들기에는 분위기의 밀도가 너무 높은 곳이다. 반면 마포 구간은 상업 지구인 홍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며 주거지역을 관통하고 있어 비교적 차분하다. 봄을 마주하기 딱 좋은 리듬감을 갖고 있다.


경의선 숲길 마포 구간




- 어느 날이든 ‘봄’이 붙으면 설렘이 시작된다.

마포 구간을 지나다 보면 여러 세대를 모두 만날 수 있다는 매력도 있다. 편의점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맥주를 마시는 대학생들, 손자와 함께 장난치는 나온 할머니, 자녀들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어머니와 아버지들, 강아지와 산책하는 신혼부부까지. 서울 어느 곳보다도 다양한 구성의 상춘객들을 만날 수 있다. 모두가 봄에 대한 설렘을 품고 이곳으로 모인다.


마포 구간의 백미는 바로 벚꽃 터널이다. 대흥역부터 공덕역까지 큰 벚꽃나무들이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다. 이곳을 걸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봄이 어떻게 만개하는지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다. 걷는 행위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에서는 역설적으로 봄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이 된다. 눈이 녹고, 새싹이 돋아나며, 잎이 커지고 결국에는 꽃이 만개하고야 마는 그 장면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때로는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봄이라는 계절 자체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이것은 감상이나 관찰이 아니라 하나의 체험에 가깝다.


기차가 달리던 철길이 이제는 꽃이 피는 숲길로 바뀌었다. 더 이상 철마는 달리지 않지만 이제는 그 길을 열차 대신 설렘이 지나고, 흔적만 남은 간이역들도 여전히 봄을 만나는 대합실로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경의선 숲길에서는 누구나 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그 품에 안기는 순간 모두가 봄의 일부가 되고, 이윽고 봄 그 자체가 된다.



2. 영원히 마르지 않는 과하주(過夏酒), 한강

 

서울의 여름에는 한강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서울 시민으로써 따라야 할 숙명이다. 여름이 가장 큰 매력은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정오의 경쾌한 운율은 밤이 깊어져도 시들지 않는다.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강은 강북과 강남, 그리고 강 위의 운율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여름의 한강은 끊김 없이, 낮과 밤의 뚜렷한 경계도 없이, 시종일관 아름답다.


한강을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걸어서 한강 다리를 건너 여의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거주지에서 한강까지 걸음으로써 일상과 한강이 이어져있음을 느낄 수 있다. 둘째, 한강에 가까워질수록 나와 같이 한강을 향해가는 동지들을 만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라이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경쾌하게 뛰는 러너, 한강 다리 위에서 연신 셔터를 누르는 빛 사냥꾼까지, 이날은 모두가 한강의 친구이자 서로의 동지다. 동지가 있으면 길이 비록 멀다 해도 지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한강을 아주 오래, 그리고 천천히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시원한 강바람이 얼굴을 할퀼 때, 비로소 여름의 한강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다. 이때 한강은 단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내가 여름을 만끽하는 과정 그 자체가 된다.


다리 위에서 만난 절경


- 한강과 나의 오작교, 서강대교

강북에 살고 있는 나는 주로 마포대교나 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넘어간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한강에 노을이 비치는 저녁이다. 여의도로 들어갈 때는 난간이 낮은 서강대교에서 노을을 보고, 해진 후에 돌아올 때는 비교적 밝은 마포대교를 선택한다. 노을이 지기 30분 전 출발하면 다리의 절반쯤 이르렀을 때 노을을 마주할 수 있다. 이때 하늘과 한강이 모두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이 시간에는 이마에 흐르는 땀도, 조금씩 아파지는 다리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 김영하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한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일 것이다.


여의도 한강공원에 도착하면 이미 사람들이 여름을 만끽하고 있다. 강변에 서서 강북의 빌딩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넓은 공원 위를 달리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어떤 곳에는 푸드트럭이, 어떤 곳에는 버스킹이, 어떤 곳에는 시끌벅적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 분명 평소라면 시끄럽게 느껴질만한 것들이 모조리 펼쳐지고 있음에도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한강에서는 누구나 한결 여유로워진다. 하나 더 내려놓게 되고, 하나 더 긍정하게 된다. 부채처럼 펼쳐진 한강이 우리를 품듯, 우리도 무언가 하나 더 끌어안게 된다. 때문에 여름의 한강은 매일이 축제고, 우리는 축제의 구성원이자 관객이 된다.


강변북로를 밝히는 자동차들


- 한강의 시간은 원형으로 흐른다.

 여름의 한강이 주는 마지막 매력은 바로 끊임없이 반복해도 행복감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없이 여름의 한강을 찾았지만 매번 집에 돌아온 후에 "역시 한강은 언제나 좋아. 다음에 또 가야지" 혼잣말을 되뇌며 잠들게 된다. 밀란 쿤데라는 저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의 행복이 지속되지 않는 것은 시간은 원형이 아닌 직선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늘 낯설고 새로운 시간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한번 맛본 행복을 반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여름의 한강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가 여름의 한강을 만끽해 봤다면 아마 그 문장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고집을 부려본다.


한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마치 언제라도 전화를 걸 수 있는 친구처럼, 늘 같은 곳에 있으면서 한 번도 즐거운 신뢰를 깬 적이 없다. 무더운 여름, 맥주 한잔하고 싶은 저녁, 나는 늘 오래된 친구를 찾듯 한강을 찾는다. 내가 서울에서 보낸 여름은 곧 한강에서 보낸 여름이었다.



3. 붉게 물든 상념들 사이를 걷다, 덕수궁과 정동길


“봄이다.” 앞에는 “와!”가 붙고, “가을이다.” 앞에는 “아!”가 붙는다. 가을은 언제나 생각보다 먼저 와 있고, 한번 찬바람이 불면 누구나 상념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서울의 가을은 상념으로만 보내기엔 너무 아름답다. 가을이 되면 서울의 하늘은 푸르게 열리며, 잎은 얼굴을 붉히며 물러난다. 많은 이들이 서울을 벗어나 멀리 가을을 만나러 가지만 서울 한복판에서도 충분히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 바로 덕수궁과 정동길이다.


- 가장 친절한 고궁, 덕수궁

덕수궁은 조선 초기 왕가의 별궁으로 지어졌다. 임진왜란 직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 역할을 하였고, 대한제국 때는 고종의 거처가 되어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1907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즉위하며 기존의 경운궁이라는 명칭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궁은 방문객에게 아주 친절한 고궁이다. 먼저 지하철역에서 가깝다. 얼핏 보면 시청역 2번 출구가 덕수궁의 정문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서울 5대 고궁 중 가장 뛰어난 접근성을 자랑하는 역세권 고궁이다. 두 번째로 그늘이 많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을 지나면 광명문, 중화문, 그리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중명전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마치 숲처럼 펼쳐져 있다. 햇빛이 강한 정오에 찾아도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다.


덕수궁과 은행나무


마지막으로 은행나무다. 숲처럼 펼쳐진 은행나무들 덕분에 가을의 덕수궁은 어느 고궁보다도 아름답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놓인 낙엽들 덕분에 궁으로 향하는 길부터 아름답고, 궁에 이르러 대한문을 통과하면 카펫처럼 깔린 단풍들이 반갑게 방문객을 맞는다. 서울의 어느 고궁이 아름답지 않겠냐마는 가을에는 덕수궁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 시간의 골목, 정동길

대한문을 나와 돌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정동길이다. 정동길은 덕수궁 돌담길로 시작해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 서대문이 있었던 정동사거리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서울의 걷기 좋은 길로 꼽히는 정동길이지만 정동의 시작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다. 정동(貞洞)이라는 지명은 정릉(貞陵)을 그 어원으로 한다. 지금은 성북구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1356년 ~ 1396년)의 능이다.


정릉은 본래 현재의 영국대사관 인근에 위치했다. 예법에 따르면 능은 도성 밖에 조성하는 것이 옳지만 그리움이 컸던 이성계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신덕왕후 사후 2년 뒤인 1398년, 신덕왕후가 왕위 계승에 반대했던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장악한다. 이후 이성계가 사망하자 이듬해인 1409년, 이방원은 정릉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버리고 기존 봉분은 흔적마저 없애 버린다. 이어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강등되었는데 다시 왕비로 복권된 것은 사후 270여 년이 지난 1669년에 이르러서다.


정동길의 가을


정동의 첫 등장은 서슬 퍼런 복수극이었지만 오늘날 정동길에서 이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지금의 정동길은 100여 년 전 서울의 시간을 걷기 좋은 곳이다. 이 일대는 구한말 외국 선교사와 외교관들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라 자연스레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면 오래지 않아 서울시립미술관을 만난다. 일제강점기부터 법원으로 사용되다 1995년 서초동으로 법원으로 이전한 후에 미술관으로 탈바꿈하였다. 지금도 미술관 옆에는 서울중앙지법 중부등기소가 남아있어 과거 법원 시절 역사를 짐작게 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 과거 신아일보의 사옥이었던 신아기념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오는 ‘글로리 빈관’의 모티프가 된 ‘손탁호텔’ 터(현재 이화여고 자리)가 이어진다. 정동길은 작은 골목조차 숨은 볼거리들이 많은데 국립정동극장 옆 골목을 따라가면 을사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이, 예원학교 옆 골목엔 과거 러시아 공사관터가 있다. 근대 건축물 찾는 재미와 더불어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단풍 또한 압권이다. 햇볕을 받은 붉은 벽돌 건물이 마치 단풍과 짝을 이룬 듯하다.


가을에 정동길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덕수궁과 함께 즐기기 좋다. 덕수궁이 머무르기 좋은 곳이라면 정동길은 걷기 좋은 길이다. 특히 덕수궁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앞까지는 매일 정오를 전후로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된다. 두 번째로 경사가 완만하다. 완만한 경사는 보행친화적면서 동시에 평탄한 길보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야트막한 언덕이 마치 시간의 더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 번째로 먹거리가 많다. 정동길 입구의 리에제 와플, 캐나다 대사관 옆 정동독립맥주공장, 성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운영하는 카페 산 다미아노, 정동길 터줏대감 허수아비 돈가스까지. 장르도 국적도 다양하다.


덕수궁과 정동길은 언제 찾아도 좋은 곳임에 틀림없지만 그 백미는 분명 가을이다. 가을은 상념의 계절이라 한 해가 지나가는 무상함에 허무에 빠지기 쉽다. 이루지 못하고 흘러간 날들에 대해 자책하기도, 그날의 자신을 연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동길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을과 서울의 아름다움뿐이다. 별빛처럼 빛나는 단풍 아래서, 100년의 격동을 겪고도 아름답게 남은 서울의 골목 위에서, 나 역시 그들처럼 한 해를 잘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긍정하게 된다.



4. 하얀 적막과 마주하는 곳, 종묘

겨울이 오면 한 해를 정리하게 된다. 나에게 한 해를 정리한다는 것은 흘려보낼 것과 남겨둘 것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항상 세밑에 다다르면 경계 없이 뒤섞인 기억들을 생선 가시 바르듯 하나하나 발라내야 했다. 자연히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고요한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매년 겨울엔 종묘로 향했다.


종로 3가와 창경궁 사이에 위치한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태조 3년인 1394년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되었다. 종묘는 서울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다. 정숙이 요구되는 사당이라는 공간의 특성과 함께 담장과 숲이 종묘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방문객이 적은 겨울 늦은 오후에는 오롯이 종묘와 단둘이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눈 덮인 흙길을 지나 소나무 사이를 건너 정전으로 향하는 길은 고요로 향하는 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정전의 남문을 지나면 드디어 종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정전을 마주하게 된다.


종묘 정전


- 고요와 마주하는 순간, 정전

정전은 첫눈에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우선 한눈에 잡기 힘든 좌우 117m에 달하는 크기가 그렇다. 두 번째로 정전은 높이 1m의 월대 위에 얹어져 있어 남문으로 들어온 관람객은 자연히 정전을 올려다보게 된다. 누구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단을 통해 월대에 오르면 드디어 거대한 정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마치 거대한 파도가 눈앞에서 멈춘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전과 월대


특히 남문과 정전 사이에 40m에 펼쳐진 월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성을 갖는데, 월대에 오르는 순간부터 정전 앞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 마치 다른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건축가 승효상은 이 월대를 두고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매개의 공간이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하는 본질적 공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누구나 월대에 올라서면 그 말을 곱씹게 되고 이내 동의하게 된다.


종묘 정전의 가장 큰 매력은 장엄하지만 위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거대한 스케일이 보는 이를 놀라게 하지만 이것은 정복이나 지배를 위한 욕망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수 백년의 시간을 가장 간결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표현한 절제에 가깝다. 첫눈에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이내 아득한 감동만을 남기는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정전 앞에 서면 잡다한 관념들이 사멸하고 뒤틀린 내압(內壓)이 풀게 된다.


- 겨울, 종묘, 그리고 눈(雪)

종묘 정전은 특히 눈이 내린 날 아름다움이 더한다. 검은 기와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일 때 종묘의 숭고미는 극에 달한다. 흑과 백의 조화, 아득히 멀어지는 처마 끝을 소실점을 바라보면 감정의 부유물들이 가라앉고 다시 평온해진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새해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이다.


깊은 눈이 내려서 세상을 덮으면 모든 것은 최소한의 형태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남은 최소한의 형태만으로도 사물을 식별하고 길을 찾는데 무리가 없다. 어찌 보면 눈은 가장 중요한 단 하나를 위해 나머지 것들을 가려주는 하얀 적막이다. 겨울 종묘도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 나오며


겨울이 시작되었다. 올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운 겨울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한편으론 아쉽지만 그런 계절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기 마련이다. 불과 며칠 전엔 두꺼운 외투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제 3일 뒤부터는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래,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지. 혼잣말을 되뇌며 자연스레 지난 계절들을 떠올린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것은 하나의 공간을 네 개의 공간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는 새로운 서울을 만났고, 그 덕분에 더 많은 애착과 기억을 서울에 새길 수 있었다. 나는 계절을 따라 서울을 걸었고, 서울을 따라 계절을 걸었다.



필자소개 : 스토리클럽 3기 '쓸(write)만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여행자, 김진규'

10대 시절 해외 밴드의 내한공연이 보고 싶어 무작정 서울을 동경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에서 보고 싶은 밴드 리스트'를 작성했으며 13년이 지난 2022년, 드디어 갈망하던 모든 밴드를 만난 행운아. 20살 이후 10년 넘게 신촌 주변에 살고 있다. 남쪽으로는 사당, 동쪽으로는 건대를 벗어나지 않으며 강남역은 지구의 반대편이라고 생각하는 극(極)강북러. 이제는 서울이 도착점이 아닌 출발점이 되어버린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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