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간 속 예지동 시계골목>
김세영
나는 오래된 것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삐뚤삐뚤 낡은 건물이 줄지은 골목길을 걸을 때면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간다. 골목도 그렇지만 오래되어 낡거나 고장 난 기계식 시계 같은 물건도 마찬가지다. 매일 언제 어디서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스마트워치가 보급된 요즘에도 똑딱똑딱 열심히 움직이려 노력하는 태엽들을 보고 있자면 괜스레 복잡한 감정이 생겨난다. 애정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연민이기도 한 이 감정은 몇 년 전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평생을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옛말처럼 너무나 갑작스럽게 힘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병실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 나는 세상이 무너진 듯 극도의 불안과 참담함을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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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린 시절 나의 모습> |
희미한 기억 속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가족 나들이에 나섰던 어느 봄날이 시작이었다. 외출에 신이나 들뜬 나를 아버지는 자기 어깨 위에 올려 목말을 태웠었는데, 태어나 처음 경험한 높이의 두려움과 몸이 붕 떠오르던 짜릿한 느낌, 그리고 내가 떨어지지 않게 지켜줄 거라는 믿음까지 그 순간의 경험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각인되었을 만큼 강렬했다. 그땐 아버지의 커다란 등이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멋있어 보였고, 비디오 영화 속 지구를 지키는 영웅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나의 유년 시절 내내 내가 만들지 못하는 어려운 걸 뚝딱 만들어 낸다거나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어른이 될 무렵에는 진로 문제와 고민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배웠던 첫 번째 남자였고, 내가 되고 싶었던 유일한 남자였다.
오래된 골목을 걷기 시작한 건 아버지가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했을 무렵부터였다. 누구보다 강하고 거대해 보였던 그의 등은 어느덧 몰라보게 왜소해져 있었다. 은연중 자신은 이제 늙었고, 오래되었고, 약해졌고, 고장 났다며 체념하고 인정하는 듯한 모습이 보일 때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마음 둘 곳을 찾다 발견한 게 골목이었다. 집 앞에 있는 작은 골목부터 시작해 서울 곳곳에 있는 골목들을 찾아다니며 오래된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했다. 늙거나 낡아서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것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건네고 싶었고, 또 위안받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예지동에 있는 시계골목에 발길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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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세월을 함께한 예지동 시계골목> |
주말에 일이 있어 잠시 광장시장에 들렀다가 우연히 방문한 종로4가 시계·금·은 도매상가는 예지동 시계골목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며 이미 우리나라 시계의 메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부터 좁은 골목을 채운 시계 매장들은 엄청난 양의 시계를 팔고 있었다. 그곳에는 못 고치는 게 없는 기계식 시계 수리의 장인부터 없는 게 없어 오래된 부품마저도 어떻게든 다 구해주거나 정 없을 땐 직접 만들어 내기까지 하는 만능수리점까지 온통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땐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입구부터 붐비는 인파 중 6~70대 노인과 2~30대 청년이 뒤섞인 생경한 풍경이 묘하게 궁금증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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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기다리는 진열장 속 시계들> |
저마다 가게 앞에 내놓은 진열대에는 무심하게 놓인 시계들이 눈길을 끌었다. 몇몇 곳은 그냥 쌓아놨다고 할 정도로 진열장에는 꽤 많은 시계가 있었고, 사람들은 눈을 가까이 댄 채,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그 속에 든 시계를 관찰하고 구경했다. 나 역시 그들 사이에서 구경을 이어가다 우연히 발견한 게 바로 60년대 만들어진 오메가의 빈티지 시계였다. 비닐 포장조차도 되어 있지 않았던 그 시계는 요즘의 그것과는 달리 매우 작은 크기에 수수하면서도 올드한 디자인의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곳저곳 스크래치도 약간씩 있는 게 말이 좋아 빈티지인 거지 그냥 남이 쓰던 낡은 골동품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시계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낡고 빛바랜 시계에서 조금씩 약해져만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기계식 시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어떠한 흥정도 없이 덜컥 구매를 해버렸다.
생전 처음으로 빈티지 시계를 사고 난 뒤 집에 돌아와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시계를 사 본 적은 있어도 기계식 시계가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뭘 어떻게 조작하는 건지, 혹여나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해야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걱정과 후회가 동시에 밀려왔다. 우스운 말이지만 당시에는 마치 작고 여린 어린아이나 노쇠한 노인을 돌보는 것과 비슷한 불안이 느껴졌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인터넷을 뒤져가며 빈티지 시계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외국의 유명 시계 포럼에서 오래된 시계의 관리법이나 자성이나 방수에 취약한 빈티지 시계를 보관하는 정보를 검색했다. 그날부터 오래된 시계를 수집하는 동안 나는 시계로부터 적잖은 위안을 받았고, 그만큼 애정을 쏟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가진 빈티지 시계의 수는 조금씩 늘었고, 하나둘 개수가 늘어갈 때마다 시계는 단순한 물건 이상의 의미가 되어갔다.
나는 시간이 날 때면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예지동 시계골목을 자주 찾았다. 그곳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시계를 구경했고, 때론 온라인 경매에서 낙찰받은 낡은 시계를 고치기도 했다. 커스텀이라 불리는 일부 부품의 교체는 물론 전체를 다 분해해 청소 및 수리하는 오버홀까지 그곳에서 시계의 고장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단골 가게 사장님은 시계 줄을 조정하는 것쯤은 그냥 해줄 때가 많았고, 어쩔 땐 추가로 교체한 부품의 가격을 깎아주기도 했다. 어쩌다 움직이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가더라도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를 가진 사장님이 내 시계를 고쳐줄 때마다 어딘지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곳에서 가다 멈추거나 때론 느리게 가는 시계가 잘 고쳐지듯 아버지도 예전처럼 건강을 되찾길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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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수집한 빈티지 시계들> |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시계가 누군가의 시간이 담기는 물건이고,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건 그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여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와 비슷한 세월을 보낸 오래된 시계들이 고쳐질수록 아버지의 건강 역시 회복될 거라 믿었다. 오래된 빈티지 시계를 수집하고 예지동 시계골목을 오고 가며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적어도 그곳에서만큼은 낡거나 고장 났다고 해서 쓸모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거니까. 그리고 고장 난 곳을 고치면 다시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나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그로부터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아버지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고, 지금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다닐 정도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예지동 시계골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재개발 지역인 세운4구역에 포함되어 매장이 있던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고, 몇 년 뒤쯤 그 자리에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일부는 맞은편에 위치한 세운스퀘어로 이전을 마쳤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골목이 없다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곳을 즐겨 찾는다. 비록 골목이 사라져 목적지는 달라졌어도, 그 거리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더라도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낡고 고장 난 시계를 고치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소개 : 스토리클럽 3기 김세영
시작은 강동, 현재는 은평이라는 서울의 경계에서 주로 거주 중인 30년 차 서울러.
일상의 흔적이 깃든 서울의 작고 소담한 골목길을 좋아하는 골목 트래블러이기도 하다.
회사에선 부품 같은 매일을 보내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나만의 시간엔 사진 찍고 글을 쓰며, 때론 영화를 만든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서울살이지만 복작한 사람들 틈에 섞여 나의 이야기를 그들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예술지망생이다.
<나의 시간 속 예지동 시계골목>
김세영
나는 오래된 것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삐뚤삐뚤 낡은 건물이 줄지은 골목길을 걸을 때면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간다. 골목도 그렇지만 오래되어 낡거나 고장 난 기계식 시계 같은 물건도 마찬가지다. 매일 언제 어디서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스마트워치가 보급된 요즘에도 똑딱똑딱 열심히 움직이려 노력하는 태엽들을 보고 있자면 괜스레 복잡한 감정이 생겨난다. 애정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연민이기도 한 이 감정은 몇 년 전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평생을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옛말처럼 너무나 갑작스럽게 힘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병실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 나는 세상이 무너진 듯 극도의 불안과 참담함을 느껴야만 했다.
희미한 기억 속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가족 나들이에 나섰던 어느 봄날이 시작이었다. 외출에 신이나 들뜬 나를 아버지는 자기 어깨 위에 올려 목말을 태웠었는데, 태어나 처음 경험한 높이의 두려움과 몸이 붕 떠오르던 짜릿한 느낌, 그리고 내가 떨어지지 않게 지켜줄 거라는 믿음까지 그 순간의 경험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각인되었을 만큼 강렬했다. 그땐 아버지의 커다란 등이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멋있어 보였고, 비디오 영화 속 지구를 지키는 영웅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나의 유년 시절 내내 내가 만들지 못하는 어려운 걸 뚝딱 만들어 낸다거나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어른이 될 무렵에는 진로 문제와 고민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배웠던 첫 번째 남자였고, 내가 되고 싶었던 유일한 남자였다.
오래된 골목을 걷기 시작한 건 아버지가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했을 무렵부터였다. 누구보다 강하고 거대해 보였던 그의 등은 어느덧 몰라보게 왜소해져 있었다. 은연중 자신은 이제 늙었고, 오래되었고, 약해졌고, 고장 났다며 체념하고 인정하는 듯한 모습이 보일 때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마음 둘 곳을 찾다 발견한 게 골목이었다. 집 앞에 있는 작은 골목부터 시작해 서울 곳곳에 있는 골목들을 찾아다니며 오래된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했다. 늙거나 낡아서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것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건네고 싶었고, 또 위안받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예지동에 있는 시계골목에 발길이 닿았다.
주말에 일이 있어 잠시 광장시장에 들렀다가 우연히 방문한 종로4가 시계·금·은 도매상가는 예지동 시계골목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며 이미 우리나라 시계의 메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부터 좁은 골목을 채운 시계 매장들은 엄청난 양의 시계를 팔고 있었다. 그곳에는 못 고치는 게 없는 기계식 시계 수리의 장인부터 없는 게 없어 오래된 부품마저도 어떻게든 다 구해주거나 정 없을 땐 직접 만들어 내기까지 하는 만능수리점까지 온통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땐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입구부터 붐비는 인파 중 6~70대 노인과 2~30대 청년이 뒤섞인 생경한 풍경이 묘하게 궁금증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저마다 가게 앞에 내놓은 진열대에는 무심하게 놓인 시계들이 눈길을 끌었다. 몇몇 곳은 그냥 쌓아놨다고 할 정도로 진열장에는 꽤 많은 시계가 있었고, 사람들은 눈을 가까이 댄 채,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그 속에 든 시계를 관찰하고 구경했다. 나 역시 그들 사이에서 구경을 이어가다 우연히 발견한 게 바로 60년대 만들어진 오메가의 빈티지 시계였다. 비닐 포장조차도 되어 있지 않았던 그 시계는 요즘의 그것과는 달리 매우 작은 크기에 수수하면서도 올드한 디자인의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곳저곳 스크래치도 약간씩 있는 게 말이 좋아 빈티지인 거지 그냥 남이 쓰던 낡은 골동품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시계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낡고 빛바랜 시계에서 조금씩 약해져만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기계식 시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어떠한 흥정도 없이 덜컥 구매를 해버렸다.
생전 처음으로 빈티지 시계를 사고 난 뒤 집에 돌아와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시계를 사 본 적은 있어도 기계식 시계가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뭘 어떻게 조작하는 건지, 혹여나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해야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걱정과 후회가 동시에 밀려왔다. 우스운 말이지만 당시에는 마치 작고 여린 어린아이나 노쇠한 노인을 돌보는 것과 비슷한 불안이 느껴졌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인터넷을 뒤져가며 빈티지 시계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외국의 유명 시계 포럼에서 오래된 시계의 관리법이나 자성이나 방수에 취약한 빈티지 시계를 보관하는 정보를 검색했다. 그날부터 오래된 시계를 수집하는 동안 나는 시계로부터 적잖은 위안을 받았고, 그만큼 애정을 쏟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가진 빈티지 시계의 수는 조금씩 늘었고, 하나둘 개수가 늘어갈 때마다 시계는 단순한 물건 이상의 의미가 되어갔다.
나는 시간이 날 때면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예지동 시계골목을 자주 찾았다. 그곳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시계를 구경했고, 때론 온라인 경매에서 낙찰받은 낡은 시계를 고치기도 했다. 커스텀이라 불리는 일부 부품의 교체는 물론 전체를 다 분해해 청소 및 수리하는 오버홀까지 그곳에서 시계의 고장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단골 가게 사장님은 시계 줄을 조정하는 것쯤은 그냥 해줄 때가 많았고, 어쩔 땐 추가로 교체한 부품의 가격을 깎아주기도 했다. 어쩌다 움직이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가더라도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를 가진 사장님이 내 시계를 고쳐줄 때마다 어딘지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곳에서 가다 멈추거나 때론 느리게 가는 시계가 잘 고쳐지듯 아버지도 예전처럼 건강을 되찾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시계가 누군가의 시간이 담기는 물건이고,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건 그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여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와 비슷한 세월을 보낸 오래된 시계들이 고쳐질수록 아버지의 건강 역시 회복될 거라 믿었다. 오래된 빈티지 시계를 수집하고 예지동 시계골목을 오고 가며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적어도 그곳에서만큼은 낡거나 고장 났다고 해서 쓸모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거니까. 그리고 고장 난 곳을 고치면 다시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나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그로부터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아버지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고, 지금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다닐 정도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예지동 시계골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재개발 지역인 세운4구역에 포함되어 매장이 있던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고, 몇 년 뒤쯤 그 자리에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일부는 맞은편에 위치한 세운스퀘어로 이전을 마쳤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골목이 없다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곳을 즐겨 찾는다. 비록 골목이 사라져 목적지는 달라졌어도, 그 거리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더라도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낡고 고장 난 시계를 고치고 있으니 말이다.
시작은 강동, 현재는 은평이라는 서울의 경계에서 주로 거주 중인 30년 차 서울러.
일상의 흔적이 깃든 서울의 작고 소담한 골목길을 좋아하는 골목 트래블러이기도 하다.
회사에선 부품 같은 매일을 보내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나만의 시간엔 사진 찍고 글을 쓰며, 때론 영화를 만든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서울살이지만 복작한 사람들 틈에 섞여 나의 이야기를 그들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예술지망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