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따라 걷는 서울의 이야기
: 북촌, 서촌,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세진
들어가며
내가 기억하는 서울 북촌의 최초 이미지는, 2010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앞두던 시즌이었던 것 같다. 당시 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들뜬 기분으로 어디를 놀러 가야 할지 친구들과 열 띤 토론을 벌이던 순간이었다. 서울 강북구 변방에 위치한 학교의 지리적 특성으로 우리는 늘 성신여대 입구, 한성대 입구, 혜화역 등 버스나 지하철로 손쉽게 당도할 수 있는 지역 내에서 노닥거리곤 했다. 점차 근방 동네에서만 놀거리를 찾는 것이 싫증이 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였다. 고등학생 1학년들이라고 해봤자 부모님의 울타리 속에서 동네 밖도 제대로 나가보지 못한 햇병아리들이었으니, 우리에겐 새로운 장소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나름의 생애 첫 서울 여행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지하철을 이용하여 혜화역을 넘고 동대문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나 충무로역에서 내렸으며, 그 후 우리는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다가 마침내 운명처럼 안국동에 도착하였다.
당시 안국동을 방문하고 느꼈던 감정은, 이곳은 마치 다른 시대의 세상 같다는 기분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한옥 지붕과 알록달록한 건물들, 경복궁 담벼락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사람들과 거리에 수많은 액세서리 공방들.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겐 기존과는 다른 이질적인 세상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기 충분했던 것 같다.
2010년의 안국동/삼청동은 지금과는 달리 카페나 프랜차이즈점들이 대규모로 입점해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당시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막 유명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리에 느껴지는 따뜻한 사람의 분위기, 곳곳에서 나는 밥 짓는 냄새와 거리를 채우고 있는 공방들, 동네 대청마루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시던 할머니들까지 나에게 있어서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을 쓰기엔 이때만큼 적합한 순간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서울 사랑 아니, 서울의 북촌/서촌/삼청동 사랑은.
그 후로 이곳은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20살 처음으로 시작한 첫사랑과의 두 번째 데이트가 이루어진 곳이었으며, 삶의 가장 힘든 순간 그저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을 때 정처 없이 걷는 장소 또한 이곳이기도 했다. 생애 첫 취업이라는 것을 해보면서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취업 턱이라는 것을 내본 장소이기도 했으며, 지금 바로 이 순간 이 글을 쓰는 장소이기도 하다.
얼마만큼 전달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내가 이 장소에서 느꼈던 추억과 감정을 이름 모를 당신에게 전달한다. 어떤 글쓰기 방식이 나의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하던 찰나, 나는 ‘영화’라는 매개체를 생각해냈다. 서울 북촌/서촌을 배경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김종관, 홍상수, 윤태용 감독의 영화를 소개하고 그 자취를 따라 걷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잠시나마 눈을 감고 이곳에서 행복한 여행을 하기를 바란다. 당신 생의 어느 날 우연히도 이 장소를 거닐다 문득 이 글의 짧은 문장 하나라도 회상된다면, 나에게 있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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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테이블' 포스터 |
김종관 감독의 영화 ‘더테이블’ 속 향수 가게
김종관 감독은 서울 북촌과 서촌 일대를 다양한 이야기의 방식으로 영화에 담아내는 감독이다. 실제로 김종관 감독은 서촌이라는 동네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 지역에서 주거하고 있다고 하니, 감독의 북촌/서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얼마나 클지는 손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더테이블’은 서촌의 어느 카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4가지의 이야기를 담아낸 잔잔한 커피 향과 같은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는 어느 이를 모를 카페에서 진행된다. 영화 ‘더테이블’ 속에 스며있는 서촌 고유의 기분 좋은 잔잔함과 운치에 매료된 나는 영화 속 이야기의 무대가 된 카페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영화 속 카페를 찾아가기 위해, 장소를 찾던 중이던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테이블’에서 카페로 소개된 장소는 사실 실제로는 카페가 아닌 ‘베르씨빌라쥬’라는 향수 가게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직접 방문하여 입구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에 가닿았다. 먼 거리에서 이곳까지 찾아오며 쌓인 피로도와 우려가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순간이었다. 가게의 전경은 영화 속 카페의 그 모습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영화 속 테이블이 위치하던 그 공간을 응시함과 동시에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되기 시작하였다.
‘베르씨빌라쥬’를 구경하고 나오면서, 문득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라는 부러움이 생겼다. 퇴근길에,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동네 마실을 나가는 주민들이 종종 이와 같은 감미로운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크나큰 행복이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곳에 꼭 다시 방문하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을 남긴 채 나는 집으로 향했다. 영화 ‘더테이블’의 서정적 운치와 서촌의 향수를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주저 없이 이곳을 방문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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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유의 언덕' 포스터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자유의 언덕’ 속 카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홍상수 감독을 모르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김종관 감독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서울 북촌/서촌 일대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내고 있는 홍상수 감독은, 골목골목 이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취와 분위기를 가장 환상적인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특히 영화 ‘자유의 언덕’은 서울 북촌의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영화에 옮긴 대표작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카페 ‘지유가오카 핫초메’는 영화 속 주인공 모리와 카페 주인 영선이 만나 다소 철학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공간이다. 2022년 9월 어느 가을날, 나는 이 카페를 직접 찾아 나섰다.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영화 속 카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뜻밖의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잔잔한 바람과 해 질 녘 노을이 가닿아 있는 북촌길이었다. 카페 내부에 들어가니, 방문 전 블로그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영화 ‘자유의 언덕’ 관련 포스터는 사라지고 내부구조에는 많은 변화가 있는 상태였다. 영화 속 정취를 그대로 느끼고 싶었던 소망이 있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카페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영화 속 주인공 모리의 대사와 감정을 홀로 곱씹어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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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노을이 가닿아 있는 북촌길 | 카페 '지유가오카 핫초메' 전경 |
주인공 ‘모리’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으로 이곳 서울 북촌이 설정된 것은 놀라울 만큼 탁월한 선택이었다.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이야기, 미래의 가능성 이 3가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 ‘자유의 언덕’은 과거의 전통문화와 현대적인 요소, 미래지향적인 도시의 가치가 내재하여 있는 서울 북촌의 특성과 많은 부분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자유의 언덕’ 속 ‘모리’의 지고지순하고도 애틋한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이곳 카페에 방문하여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눈을 감고 영화 속 장면들을 회상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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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북촌방향' 포스터 |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방향’속 정독도서관
홍상수 감독이 서울 북촌의 이야기를 담아낸 또 다른 영화를 꼽자면 영화 ‘북촌방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과 헤어진 연인과의 재회 등 수많은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얽혀 이곳 북촌에서 펼쳐진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 ‘성준’이 배회하던 북촌 골목골목의 길을 그대로 따라나섰다. 특히 영화 속 ‘성준’과 ‘영호’가 대화를 나누던 정독도서관을 가장 긴 시간 머물렀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짧은 몇 분만 등장하는 정독도서관은 나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장소이다. 벚꽃 명소로도 익히 유명한 정독도서관은 매년 4월이면 연인과 함께 혹은 혼자서 방문하던 20대의 추억이 스며들어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삭막한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기 싫은 날에는 장소를 핑계 대고 도망치듯 이곳 어느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였으며, 돈 없던 학생 시절 이곳의 대표 식당인 ‘소담정’에서 먹던 돈가스의 맛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뿐일까, 인생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였던 취업 필기시험 전날에도 이곳에서 마음을 다스리며 시험 준비를 하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믿을 수 없이 빨리 지나간 시간이었다.
아무튼 20살 이후 서울 북촌 일대에 애정을 가지게 되면서, 이곳에서 정말이지 수많은 추억과 경험을 쌓았던 것 같다. 아마도 이곳에서의 나의 추억은 죽기 전까지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북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특히,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을 보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지난날들이 회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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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 포스터 |
윤태용 감독의 영화 ‘서울’ 속 쌈지길/청계천
영화 ‘서울’은 저예산 독립영화로서, 기획 초기부터 서울의 관광명소를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많은 사람이 보지 않은 영화지만, 이 영화를 통해 서울 특유의 전통문화와 현대적 아름다움이 공존하고 있는 광화문/청계천/쌈지길 등과 같은 명소의 멋과 특색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여행을 와서 운명처럼 만난 두 남녀의 사랑은 서울 곳곳의 명소들을 함께 여행하면서 점차 깊어지게 된다. 17살, 제대로 된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우연히 이 영화를 보고 나중에는 꼭 영화 ‘서울’ 속 연인들과 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영화 속 배우들에 매료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영화 속 아름다운 장소들에 매료되었던 것인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12년이 지난 지금 나의 유년 시절 추억 속에 이 영화가 아직도 있다는 것은 당시 느꼈던 감동과 파급력이 무척이나 거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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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 속 주요 장면을 따라 걸으며 찍은 사진 |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장면 중 하나인 쌈지길을 돌며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청계천 돌다리에 앉아서 영화 속 장면을 회상하며 기억에 잠기기도 하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두 남녀는 헤어진다. 여자는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은 체 유유히 사라진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보내준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이내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직시하면서.
서울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 ‘서울’의 이야기처럼, 모두가 잊을 수 없이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 스토리클럽 2기 한세진
'상실의 시대'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는 29년차 서울 강북인.
모든것이 급변하는 서울살이 생존을 위해 끊임없는 경쟁과 단절된 사회 문화에 익숙해져버린 사람.
공동체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
어느 선선한 날씨의 저녁, 이웃과 함께 격없이 저녁을 먹으며 잔잔한 일상을 공유하는 삶을 그려보는 사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여, 매주 전시회, 영화, 연극을 최소 하나씩 보러다니는 사람.
무수히 남아있는 앞으로의 서울살이를 보다 잘 해쳐나가고, 바람직한 가치를 도출하기 위해 용기 내어 스토리클럽에 지원한 사람.
영화를 따라 걷는 서울의 이야기
: 북촌, 서촌,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세진
들어가며
내가 기억하는 서울 북촌의 최초 이미지는, 2010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앞두던 시즌이었던 것 같다. 당시 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들뜬 기분으로 어디를 놀러 가야 할지 친구들과 열 띤 토론을 벌이던 순간이었다. 서울 강북구 변방에 위치한 학교의 지리적 특성으로 우리는 늘 성신여대 입구, 한성대 입구, 혜화역 등 버스나 지하철로 손쉽게 당도할 수 있는 지역 내에서 노닥거리곤 했다. 점차 근방 동네에서만 놀거리를 찾는 것이 싫증이 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였다. 고등학생 1학년들이라고 해봤자 부모님의 울타리 속에서 동네 밖도 제대로 나가보지 못한 햇병아리들이었으니, 우리에겐 새로운 장소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나름의 생애 첫 서울 여행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지하철을 이용하여 혜화역을 넘고 동대문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나 충무로역에서 내렸으며, 그 후 우리는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다가 마침내 운명처럼 안국동에 도착하였다.
당시 안국동을 방문하고 느꼈던 감정은, 이곳은 마치 다른 시대의 세상 같다는 기분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한옥 지붕과 알록달록한 건물들, 경복궁 담벼락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사람들과 거리에 수많은 액세서리 공방들.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겐 기존과는 다른 이질적인 세상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기 충분했던 것 같다.
2010년의 안국동/삼청동은 지금과는 달리 카페나 프랜차이즈점들이 대규모로 입점해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당시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막 유명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리에 느껴지는 따뜻한 사람의 분위기, 곳곳에서 나는 밥 짓는 냄새와 거리를 채우고 있는 공방들, 동네 대청마루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시던 할머니들까지 나에게 있어서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을 쓰기엔 이때만큼 적합한 순간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서울 사랑 아니, 서울의 북촌/서촌/삼청동 사랑은.
그 후로 이곳은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20살 처음으로 시작한 첫사랑과의 두 번째 데이트가 이루어진 곳이었으며, 삶의 가장 힘든 순간 그저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을 때 정처 없이 걷는 장소 또한 이곳이기도 했다. 생애 첫 취업이라는 것을 해보면서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취업 턱이라는 것을 내본 장소이기도 했으며, 지금 바로 이 순간 이 글을 쓰는 장소이기도 하다.
얼마만큼 전달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내가 이 장소에서 느꼈던 추억과 감정을 이름 모를 당신에게 전달한다. 어떤 글쓰기 방식이 나의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하던 찰나, 나는 ‘영화’라는 매개체를 생각해냈다. 서울 북촌/서촌을 배경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김종관, 홍상수, 윤태용 감독의 영화를 소개하고 그 자취를 따라 걷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잠시나마 눈을 감고 이곳에서 행복한 여행을 하기를 바란다. 당신 생의 어느 날 우연히도 이 장소를 거닐다 문득 이 글의 짧은 문장 하나라도 회상된다면, 나에게 있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 ‘더테이블’ 속 향수 가게
김종관 감독은 서울 북촌과 서촌 일대를 다양한 이야기의 방식으로 영화에 담아내는 감독이다. 실제로 김종관 감독은 서촌이라는 동네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 지역에서 주거하고 있다고 하니, 감독의 북촌/서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얼마나 클지는 손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더테이블’은 서촌의 어느 카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4가지의 이야기를 담아낸 잔잔한 커피 향과 같은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는 어느 이를 모를 카페에서 진행된다. 영화 ‘더테이블’ 속에 스며있는 서촌 고유의 기분 좋은 잔잔함과 운치에 매료된 나는 영화 속 이야기의 무대가 된 카페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영화 속 카페를 찾아가기 위해, 장소를 찾던 중이던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테이블’에서 카페로 소개된 장소는 사실 실제로는 카페가 아닌 ‘베르씨빌라쥬’라는 향수 가게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직접 방문하여 입구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에 가닿았다. 먼 거리에서 이곳까지 찾아오며 쌓인 피로도와 우려가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순간이었다. 가게의 전경은 영화 속 카페의 그 모습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영화 속 테이블이 위치하던 그 공간을 응시함과 동시에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되기 시작하였다.
‘베르씨빌라쥬’를 구경하고 나오면서, 문득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라는 부러움이 생겼다. 퇴근길에,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동네 마실을 나가는 주민들이 종종 이와 같은 감미로운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크나큰 행복이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곳에 꼭 다시 방문하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을 남긴 채 나는 집으로 향했다. 영화 ‘더테이블’의 서정적 운치와 서촌의 향수를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주저 없이 이곳을 방문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자유의 언덕’ 속 카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홍상수 감독을 모르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김종관 감독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서울 북촌/서촌 일대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내고 있는 홍상수 감독은, 골목골목 이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취와 분위기를 가장 환상적인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특히 영화 ‘자유의 언덕’은 서울 북촌의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영화에 옮긴 대표작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카페 ‘지유가오카 핫초메’는 영화 속 주인공 모리와 카페 주인 영선이 만나 다소 철학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공간이다. 2022년 9월 어느 가을날, 나는 이 카페를 직접 찾아 나섰다.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영화 속 카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뜻밖의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잔잔한 바람과 해 질 녘 노을이 가닿아 있는 북촌길이었다. 카페 내부에 들어가니, 방문 전 블로그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영화 ‘자유의 언덕’ 관련 포스터는 사라지고 내부구조에는 많은 변화가 있는 상태였다. 영화 속 정취를 그대로 느끼고 싶었던 소망이 있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카페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영화 속 주인공 모리의 대사와 감정을 홀로 곱씹어보기도 하였다.
주인공 ‘모리’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으로 이곳 서울 북촌이 설정된 것은 놀라울 만큼 탁월한 선택이었다.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이야기, 미래의 가능성 이 3가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 ‘자유의 언덕’은 과거의 전통문화와 현대적인 요소, 미래지향적인 도시의 가치가 내재하여 있는 서울 북촌의 특성과 많은 부분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자유의 언덕’ 속 ‘모리’의 지고지순하고도 애틋한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이곳 카페에 방문하여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눈을 감고 영화 속 장면들을 회상해보기를 추천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방향’속 정독도서관
홍상수 감독이 서울 북촌의 이야기를 담아낸 또 다른 영화를 꼽자면 영화 ‘북촌방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과 헤어진 연인과의 재회 등 수많은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얽혀 이곳 북촌에서 펼쳐진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 ‘성준’이 배회하던 북촌 골목골목의 길을 그대로 따라나섰다. 특히 영화 속 ‘성준’과 ‘영호’가 대화를 나누던 정독도서관을 가장 긴 시간 머물렀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짧은 몇 분만 등장하는 정독도서관은 나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장소이다. 벚꽃 명소로도 익히 유명한 정독도서관은 매년 4월이면 연인과 함께 혹은 혼자서 방문하던 20대의 추억이 스며들어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삭막한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기 싫은 날에는 장소를 핑계 대고 도망치듯 이곳 어느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였으며, 돈 없던 학생 시절 이곳의 대표 식당인 ‘소담정’에서 먹던 돈가스의 맛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뿐일까, 인생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였던 취업 필기시험 전날에도 이곳에서 마음을 다스리며 시험 준비를 하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믿을 수 없이 빨리 지나간 시간이었다.
아무튼 20살 이후 서울 북촌 일대에 애정을 가지게 되면서, 이곳에서 정말이지 수많은 추억과 경험을 쌓았던 것 같다. 아마도 이곳에서의 나의 추억은 죽기 전까지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북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특히,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을 보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지난날들이 회상된다.
윤태용 감독의 영화 ‘서울’ 속 쌈지길/청계천
영화 ‘서울’은 저예산 독립영화로서, 기획 초기부터 서울의 관광명소를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많은 사람이 보지 않은 영화지만, 이 영화를 통해 서울 특유의 전통문화와 현대적 아름다움이 공존하고 있는 광화문/청계천/쌈지길 등과 같은 명소의 멋과 특색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여행을 와서 운명처럼 만난 두 남녀의 사랑은 서울 곳곳의 명소들을 함께 여행하면서 점차 깊어지게 된다. 17살, 제대로 된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우연히 이 영화를 보고 나중에는 꼭 영화 ‘서울’ 속 연인들과 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영화 속 배우들에 매료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영화 속 아름다운 장소들에 매료되었던 것인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12년이 지난 지금 나의 유년 시절 추억 속에 이 영화가 아직도 있다는 것은 당시 느꼈던 감동과 파급력이 무척이나 거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장면 중 하나인 쌈지길을 돌며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청계천 돌다리에 앉아서 영화 속 장면을 회상하며 기억에 잠기기도 하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두 남녀는 헤어진다. 여자는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은 체 유유히 사라진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보내준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이내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직시하면서.
서울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 ‘서울’의 이야기처럼, 모두가 잊을 수 없이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를 바란다.
'상실의 시대'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는 29년차 서울 강북인.
모든것이 급변하는 서울살이 생존을 위해 끊임없는 경쟁과 단절된 사회 문화에 익숙해져버린 사람.
공동체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
어느 선선한 날씨의 저녁, 이웃과 함께 격없이 저녁을 먹으며 잔잔한 일상을 공유하는 삶을 그려보는 사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여, 매주 전시회, 영화, 연극을 최소 하나씩 보러다니는 사람.
무수히 남아있는 앞으로의 서울살이를 보다 잘 해쳐나가고, 바람직한 가치를 도출하기 위해 용기 내어 스토리클럽에 지원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