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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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구일섬


윤소라



구일섬, 혹은 구일랜드를 아시는지.

 

 이 곳은 구로역에서 인천행과 수원행으로 갈라지는 두 갈래의 1호선 철도 사이에 끼어있고, 남은 한 쪽은 안양천과 서부간선도로로, 또 다른 한 쪽은 대규모 물류센터와 유수지로 막혀 있다. 이 동네엔 도둑이 들어도 양쪽 입구 두 군데만 막고 서 있으면 잡을 수 있다고들 말한다. 마치 섬처럼. 사면이 바다는 아니라도 딱히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셈이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굳이 찾아올 일도, 우연히 들를 일도 거의 없다. 강 건너에 고척돔이 들어서며 이 동네에서도 낯선 이들을 종종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했지만 같은 역에서 나간다 뿐 완전히 다른 방향에, 칼바람을 맞으며 안양천을 건너야 닿을 수 있기에 기대처럼 사람들이 찾아오진 않았다. 택시조차 잡아 타기 힘들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혹은 거기 들어가면 빈 차로 나와야하는데…라며 태워주기 싫어하기가 일쑤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 곳엔 별 게 없다. 그저 동네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 학원, 마트들이 있을 뿐이다.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으나 사는 사람 입장으로는 아쉬울 것도 없다. 원하는 건 웬만해선 다 있다. 크게 즐길 거리도 없지만. 소소하게 아이 키우며 살기에, 혹은 조용히 늙어가며 살기에 좋은 동네라는 거다. 들고 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쭉 이 동네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소위 &뺑뺑이&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동네를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은 내 친구까지는 아니라도 대부분 내 친구의 친구, 혹은 내 친구의 가족 정도는 된다. 꼭 인사는 나누지 않더라도 서로 알아보는 사이의 사람들을 외출 때마다 몇 명씩 마주치게 된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곳. 설명을 할수록 참 서울스럽지는 않은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태어나 지금껏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내며 이 동네 저 동네 이사를 했지만 유독 &고향&이라 느껴지는 곳이 바로 이 구일섬이다. 뜬금없이 고향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본다.


고향

정의 1.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정의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정의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이제 알겠다. 태어나 자란 곳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도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 바로 구일섬이구나. 그 곳에서 나는 외롭지 않았다. 항상 내 편이라 느껴지는 사람들이 지척에 있었다. 살고 있는 동네에 소속감을 느낀다는 흔치 않은 감각을 느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개인 사정으로 나 혼자만 친구들과 떨어져 다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소외감이었다. 멀리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나는 구일랜드에 산다고 농담처럼, 아니 실은 진담으로 얘기했다. 몇 달 뒤 가까워진 친구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섬에서 어떻게 여기로 학교를 온거야? 뭐 타고 다니는거야?& 진짜 섬이 아니라 섬 같은 곳이라는 걸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다. 구일랜드라고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던 친구들이 또 한 번 그리워졌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이 다 그렇듯 우리 동네에도 꽃나무가 지천이었다. 봄이 오면 안양천의 벚꽃과 개나리를 본다고 사람들이 몰렸지만 내가 좋아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친구들과 신림 백순대를 먹고 돌아와 내린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가득 피는 목련. 그 다음은 옆동 어린이집을 끼고 있는 벚나무. 아이들이 나와 뛰어노는 정자 앞 공터 위로 벚꽃잎이 무한히 흩날렸다. 마지막은 현관 앞의 라일락이었다. 출근길에 라일락 꽃향기를 맡는 날이 며칠 지나고 나면 여름이 오곤 했다. 어디에 무슨 꽃이 피는지 훤히 알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피면 알아채며 지내는 생활.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떠올려보니 참 낭만적인 일이었구나 싶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어디 꽃나무 뿐일까. 어느 가게가 우리 학년 친구가 하는 집인지 뻔히 알아 일부러 찾아가곤 했다. &저 진주 친구 소라에요.& 하면 바다 속 친구 왔냐는 재미없는 농담에 한 번 웃어드리고 후식냉면을 공짜로 얻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뎅을 가장 많이 넣어주는 떡볶이 집은 어디인지, 주말 아침에도 따끈한 떡이 나오는 떡집은 어디인지 굳이 맘카페에 가입해 살펴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결혼을 하며 광진구로 이사를 했다. 어쩜 이렇게 서울의 끝에서 끝으로 오게 되었는지, 서울이라는 도시가 크기는 또 왜 이렇게 큰지. 옛 동네를 지나칠 일 조차 없는 6년을 보냈다. (역시 구일랜드다.) 새로운 동네는 여전히 낯설다. 친구라고는 남편 하나 뿐이다. 필요한 게 생기면 검색을 해봐야 찾을 수 있다. 물론 편하기도 하다. 잠옷에 패딩 하나만 입고 나가도, 떡진 머리로 후다닥 편의점에 다녀와도 아는 사람을 마주칠 확률이 0% 라니, 고향과는 많이 다르군 이라는 생각도 수십 번. 떠나올 때는 그렇게나 섭섭하고 자주 찾던 가게들과 익숙한 골목들이 아쉽더니 막상 떠나오고 나니, 부러 시간을 내어 찾기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계절마다 그리워진다. 곳곳이 익숙했던 그 곳이. 내가 살던 고향, 구일섬이 말이다.


50분 짜리 여행길

글을 쓰다보니 못내 그리워져 결혼하고 이사한 뒤 처음으로 구일섬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집에서 네비에 찍어보니 56분이 뜬다. 너무 머네… 귀찮은 마음도 잠시, 더 멀리 여행도 가면서 뭘! 구일역 앞에 다원호프 수제비 먹고 와야지! 라는 생각이 나를 일으킨다. 구일에 살 때는 운전을 하지 않던 때라 차를 몰고 구일에 가보기는 처음이다. 우습지만 대단한 금의환향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나서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부간선도로에서 이어지는 낯익은 진입로를 보니 두근두근하다.


 



 살던 아파트 앞에 차를 대고 익숙한 골목골목을 살핀다. 매년 벤치에 앉아 벛꽃엔딩을 듣던 곳을 찾아가보았다. 오늘따라 포근한 날씨에 근처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나와 뛰놀고 있다. 아, 하필. 고향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이만한 장면이 있을까 싶다. 나의 어린시절을 떠올리기 보다는 &계속 여기 살았으면 내 아기가 이렇게 뛰어놀았겠지& 싶은 마음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지나간 과거가 떠오르는 것인지 오지 않을 미래가 벌써 아쉬운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그리움이다.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다원호프&. 내가 12살일 때부터 다녔으니 최소 22년이 된 집이다. 그 사이 한번 이사를 했다. 원래는 동네에 하나뿐인 독서실(이 독서실의 사장님도 내 친구의 아빠였다. 역시 구일랜드다…) 1층에 있었다. 호프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가족들이 모여 독서실에 있는 아들, 딸을 불러내 같이 저녁을 먹곤 하던 곳이다. 남행열차를 부르던 가수 김수희 같은 스타일을 고수하던 사장님 혼자 하던 곳이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아들 부부가 물려받아 운영했다. 5년만에 찾으니 옮긴 곳에서도 내부 구조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다원호프 메뉴 그대로 운영한다고는 써있었지만 &다원 황태수제비&로 이름도 바뀌었다. 다행히 황태수제비의 맛은 그대로였다. 나오면서 물어보니 여전히 아들내외가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외국에 다녀오면 캐리어를 끈 채로 떡볶이부터 먹으러 들르던 작은 가게도 있다. 후식으로 떡볶이를 먹으려 했는데 도저히 더 들어갈 곳이 없다. 다음에 또 오게 되면 이거부터 먹어야지 다짐한다.

 


 장소가 가진 힘은 엄청나서, 쭉 여기에 살던 때 조차 떠올리지 않았던 작은 일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솟아난다. 내가 다니던 미술학원도, 동생이 다니던 어린이집도 여전히 같은 곳에 있다. 지금도 친한 중학교 시절의 친구와 말싸움을 하다 친구가 울어버렸던 놀이터도, 해도 채 뜨기 전의 이른 새벽에 출근길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도 그대로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추억부터, 어른이 되고 나서까지의 기억이 모두 이 곳에 있다. 중학교 옆길을 지나다보니, 하다못해 늘 같은 자리에 세워져 있던 체육 선생님의 빨간 티코가 떠오르기도 한다. 한 개 한 개 동을 지나쳐 걸을 때마다 이 곳에 살던 친구가, 그 친구와 나누던 대화가 생생히 살아난다. 그때 걱정하고 바라던 일들은 이미 다 잊혀졌을까? 우리의 추억은? 실은 나도 몇 년 만에 떠올리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도 이렇게 문득 나를 떠올리는 일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의 살던 고향

 오랜만에 찾아가보니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동생에게 이 곳 저 곳의 모습을 찍어 보내니 &이렇게나 그대로라고?& 라는 답장이 돌아온다. 동생은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더 나이 먹을 때까지 이 곳에 살았고 구일 이름을 단 어린이집부터 고등학교까지 나온, 그야말로 &구일키즈&다. 구일섬에 대한 글을 쓰다가 생각나서 와봤다고 하니 나야 그렇다 치지만 언니가 구일에 무슨 추억이 있냐고 묻는다. 동생이 저리 물으니 할 말이 없다. 학교를 다닌 시간을 굳이 따져보자면 6년 뿐이니 (이것밖에 안되는지 나도 이제야 알았다) 동생에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애틋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얼까. 그저 어쩌다 좋은 시절을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에도 지금도 언제나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는 친구들을 우연히도 그 때 만난 덕분일지도. 아무튼 나의 마음의 고향.


 몇 년 째 철도 차량기지 이전과 서부간선도로 지하화, 그리고 대단지 재건축 이야기가 돌지만 지지부진하다. 집주인이 실제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거주환경에 만족하기도 하고, 또 재건축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아 진행이 더디다고 한다. 누군가는 더 나은 새 집을 원하기도 할 테지. 그렇지만 나는 나의 고향이 조금 더 이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필자소개 : 스토리클럽 3기 '윤소라'

밀려나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에 늘 마음이 쓰인다. 특히 대형 아파트 단지의 오래된 꽃나무들을 아까워한다.

고층 아파트가 아닌 주거 형태에 관심이 많은, 언젠가 탈 아파트를 꿈꾸는 어느덧 23년차 서울러이자 아파트 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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